“게와 레~ (나의 스승이시여~)” 인도 카길 지역의 무슬림 신탁녀가 목 놓아 달라이라마(뗀진갸초, 79)를 부르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동요했고, 이내 경호원들은 가녀린 여인의 울부짖음을 엄호하며 달라이라마의 법좌 앞으로 그녀를 인도했다. 온몸을 기울여 3배의 전체 투지를 올리자마자 실신해버린 무녀는 마치 주검처럼 실려 나갔다.
바로 이어서 각 지역의 무녀들이 갑자기 신 내림을 받은 듯 사지를 떨며 달라이라마께서 자리한 무대 앞으로 실려 들어 왔다. 노파와 여승 그리고 평범해 보이는 남성에 이르기까지 성별과 대상도 다양했다. 그 가운데 중국 본토에서 이번 칼라차크라 관정의식에 참여한 지극히 평범해 뵈는 한 여인도 급작스레 발버둥을 치며 정신을 잃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는 칼라차크라 의식의 마지막 날, 라마들의 염송과 작법 의식이 고조되는 과정에서 순식간에 일어났다. 이어서 네충 꾸뗀라의 오라클로 모든 신탁 의식은 엄중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날 신탁승이 달라이라마에게 전한 메시지는 아직 공개가 되지 않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번 레에서 개최된 칼라차크라 법회가 달라이라마 생의 마지막 관정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꺼냈다. 8월 초에 예정되어 있던 몽골에서의 칼라차크라 법회가 중국의 영향력으로 전면 취소가 되면서 달라이라마의 8월은 다람살라 왕궁에서 고요하게 흘러가고 있다. 네충 사원의 꾸뗀라가 몽골 정부의 협력으로 울란바토르 외각에 건립 완공을 앞둔 티베트 사원을 시찰하기 위해 다람살라를 떠난 것으로 전해지면서 많은 불자들은 다시 한 번 달라이라마의 칼라차크라 법회가 머지않아 몽골에서 개최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티베트 망명정부는 8월 8일 민주주의 총리 내각 3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겔룩파 산하 냠걀사원 쫄라캉 법당에서 거행했다. 이는 달라이라마의 정치적 지도자 직무로부터 은퇴 이후 권력이양 3주년을 의미하기도 한다. 버터 램프에 불을 밝히며 다시 한 번 망명 정부의 중도 노선 정책 우메람의 중요성을 공신하는 연설을 한 총리 롭상상게 박사는, “중도정책은 강력하게 국제 사회가 연합하여 티베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이고 진취적인 방안”이라고 말하며, 그의 임기 안에 티베트가 자유를 회복하고, 달라이라마의 티베트 귀환이 성사되기를 바랐다. 이날 티베트 중앙 행정부는 131명의 분신 희생자를 추모하였고, 비폭력 노선으로 인간 가치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표어 아래 올해 2014년도를 ‘14대 달라이라마의 해’로 선포한 바 있다. (아래 법문은 33차 칼라차크라 가운데)
우리는 지금 열 가지 선으로서 스스로를 지키겠다는 서약을 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 금강상사의 지도를 받아 궁극의 성취를 이루는 조력으로 삼고자 합니다. 업과 번뇌는 실집 즉 나에 대한 집착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청정한 계율을 지닌 가운데 이 자리에서 칼라차크라 관정를 통해 성취할 바를 발원하십시오. 치목을 던집니다. 제자가 향하는 수행도의 완성을 위해 치목을 던졌으니 내면의 방해되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힘의 바탕으로 삼습니다. 치목은 남쪽에 떨어졌습니다. 제자는 지수화풍공에 해당하는 다섯 가지의 계에 하나를 더 추가하여 식을 더한 여섯 가지 계로서, 마음의 미세한 의식에 들어갈 준비를 합니다. 지수화풍이 모두 흡수되고 공의 순차에 따라 ‘4공’의 경지에 이르면 비로소 정광명으로 들어갈 준비를 갖춘 바가 됩니다. ‘나’라고 사유하는 대상 혹은 바탕은 붓다께서 빠알리어 경과 산스크리트어 경에서 공통에서 말씀 하신 바, 오온에 의지한 나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온을 다스리거나 오온을 조종하는 나의 실체를 찾아 사유하도록 합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그 어떤 오온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탐구를 통해 확인합니다. 이러한 지수화풍공 그리고 식에 의지하고 있기에 나는 보특가라입니다. 정수리의 녹색 ‘함’, 미간의 백색 ‘옴’, 목의 적색 ‘아’, 가슴의 흑색 ‘훔’, 단전의 황색 ‘호’, 음부의 적색 ‘크샤’ 이상의 6계를 온전히 관하도록 합니다.
일곱 가지의 관정 의식을 통해 각자의 근기에 맞춰 선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합니다. 보리심(장춥)은 끊을 바를 완전히 통달한 바를 의미합니다. 자비와 지혜를 양 날개로 삼는 것을 일컬어 보리심이라고 합니다. 보리심은 성취하는 것으로 깨달음의 바탕이 됩니다. 그 일깨움을 위해 행하는 것이 바로 여섯 가지의 바라밀입니다.
멸제의 궁극적 깨달음을 위한 조력에 있어 불법의 점검으로 삼는 바의 근거는 승보에 의지해야 합니다. 보시바라밀을 비롯한 여섯 바라밀의 공덕으로 일체 중생이 이롭고 모두 붓다를 성취할 수 있도록 발원하는 것이야 말로 대승의 바른 발심이며 금강승의 관정을 받는 준비 단계입니다.
깨달음을 바라보는 근거에 있어서는, <중론>의 예찬문에서 이른 바와 같이, ‘상호 의존하는 것이 공성이며 상호의존 하는 그 자체가 중도’라는 것을 항시 마음에 세기도록 하십시오. 마음에서 먼저 이루도록 하십시오. 귀의와 발심을 일으키는 예비 수습을 통해 관정을 받을 준비를 하였다면, 일체가 나라는 존재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마음의 법집을 파하고, 상호 의존하기에 중도임을 바로 일깨우도록 합니다.
칼라차크라를 통해 선한 마음을 일으켜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났다면, 이내 일생의 큰 변화를 체험으로써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서원을 세우고자 합니다. “불법승 삼보에게 깨달음을 이룰 때까지 귀의하며, 여섯 바라밀의 공덕으로 일체 중생의 이익을 위해 붓다를 이루리다.” 진심으로 이 자리에서 마음에 각인을 시키십시오. 지금 여기, 라다크 안의 불교, 힌두, 무슬림, 가톨릭, 개신교 등의 종교가 화합하도록 하는 바탕이 됨과 더불어 오늘의 티베트가 처한 가슴 아픈 현실을 딛고 일어 설 수 있는 힘이 일어날 수 있도록 그 불씨를 피워 티베트의 평화로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도래하기를 기도합니다.
중생을 이끄시는 선지자 석가모니 붓다에게 귀의합니다. 그분의 수승한 가르침의 정수는 반야부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이는 용수보살에게 모두 전수되었으며, 철학과 사상의 측면에서 제법의 모든 존재하는 것에는 자성이 없다는 것으로서 실상을 정의하였습니다. 상호 의존하여 연기함이 공성이며 상호 의존하여 존재하기에 중도입니다. 연기법을 바르게 이해할 때야 비로소 깨달음으로 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연기의 심오한 도리는 끊어야 할 바를 모두 끊은 것입니다.
불호보살의 논전은 방대하지 않지만 모든 단을 끊어 인명으로서 깨우친 바를 일깨우며, 성천 보살께서는 경량부에 의거한 중관학파의 견해를 보이셨습니다. 월칭보살께서는 현과 밀을 모두 아울러 <입중론>과 <현구론>을 통해 무엇을 끊고 자중해야 하는가에 관한 심오한 교학을 세밀하게 논쟁하셨습니다. 샨티데바께서는 희유하고도 광대한 이치에 근거한 다양한 방법으로 선근의 제자들에게 실상의 법을 보이셨습니다. 그 완성본이 <집학론>이며 이를 더 섬세하게 <입보리행론>에서 다루었습니다. 샨트락시타께서는 중관과 인식이라고 하는 유식의 두 가지 도리를 전법하셨습니다. 진실로 있다고 하는 유식의 견해에서 더 나아가 마음에서 비롯되는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설하셨습니다. 나란다 승원의 불교가 티베트의 설산에서 다시 꽃 피울 것을 예견하신 분이 바로 샨트락시타이며, 역경 사업과 율원 그리고 선정을 닦는 수행에도 폭넓게 매진하셨습니다. 파드마샴바바를 티베트로 모셔 온 이후, 비로소 티베트에 불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로서 모든 방해 요소가 정리되고 티베트의 금강승이 명확히 뿌리 내리게 되었습니다. 티베트의 법왕의 세 축을 꼽는다면, 샨트락시타와 파드마샴바바 그리고 티송데첸 왕입니다. 이어서 법칭보살에 의해 불교 논쟁의 교학이 부흥하였으며 까말라실라에 의해 양 극단을 여읜 중관의 사상과 수습 차제 론이 명확히 정립되었습니다.
과연 명상만으로 해탈을 할 수 있을까요? 듣고 사유하여 행하지 않는다면 절대 깨달음의 해탈을 이룰 수 없습니다. 스승에게 법을 청해 듣고 지성의 힘으로서 스스로 사유하여 확신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수행을 통해 정진한 바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마치 과학자들의 학제 연구와 실험을 병행하는 원리와 같습니다. 양자 물리학의 경우는 현대 과학의 학문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에서의 상호 의존 연기라고 하는 2천 500년 이전의 시간과 통섭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경이로운 통섭입니까.
붓다께서 실유의 이치를 가르침을 통해 보이신 바를 진나보살은 인명의 법을 통해 세밀히 나누어 중생의 지혜를 향상시키는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법칭보살께서는 <성량론>을 통해 선서를 마음에 품고 경과 유식의 이치를 깨우치게 하셨습니다. 아티샤 존자와 같은 경우는 사캬파의 도차제와 겔룩의 보리도차제 가르침의 기반을 세우신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삼사부의 수행 정진에 있어서 속제와 진제의 이제를 보이신 분입니다. 근도과로서 이제를 바로 알고 사성제를 통해 윤회에 들어가 마침내 윤회로서 벗어나는 길을 찾게 하였으니 이상의 논사들의 가르침을 신중히 익혀 논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인과의 논리를 바로 알 때야 사성제를 체득할 수 있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알아 괴로움을 끊으며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도를 닦으니 여래와 선서로 칭하는 붓다란 과연 누구이며 어떠한 가르침을 주셨고 승가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확실히 자신의 것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붓다께서는 상호 의존한다는 연기법을 통해 궁극의 법을 알아 끊어야 할 바를 완전히 끊었으며 그러한 깨달음의 기반은 사랑과 자비였음을 염두 하세요.
모든 것은 공성에서 다시 태어나며 일체는 모두 공합니다. 과연 공성이란 무엇이며 중도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금강승의 본존 수행은 절대 이익 됨이 없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과연 인무아와 법무아가 무엇인가를 확실히 나의 것으로 정의하고 수행의 참된 맛을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옴 쑴바와. 모든 것은 공空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