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스님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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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씨앗이여 그 싹을 틔워라
“나의 고향 티베트에서 탈출한 지 한 달여, 1959년 4월 19일 마침내 인도 마수리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립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학생 여러분들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일이지요. 그로부터 망명지에서의 삶을 개척한 지 56년의 세월이 흘렀군요. 인도에서 출생한 대다수의 학생들이 얼마나 티베트를 체감하며 성장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나에게 남은 생애는 아마도 10년, 길어야 20년 남짓일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당부하고 싶은 바가 있습니다. 나는 티베트에 의한 티베트인을 위한 티베트의 달라이라마입니다. 망명지의 청소년 여러분, 우리 티베트의 숭고한 문화유산들을 오롯이 전수받아 보존하는데 책임감을 지녀 주십시오. 여러분이 바로 티베트의 내일입니다.”
학생들을 위한 달라이라마(뗀진갸초, 80)의 정기 법문이 티베트 어린이 마을학교(Tibetan Children’s village)에서 열렸다. 인도 전역 TCV학교에 재학 중인 4500여 명의 학생들과 대학생들은 5월 27~29일 삼일간 개최된 이번 법회를 위해 다람살라를 찾았다. 달라이라마의 인도 망명 이후 9회 차를 맞은 이번 법회는 ‘티베트불교입문’을 주제로 진행됐다. 마지막 날은 관세음보살계 관정과 달라이라마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식을 끝으로 열흘간의 여름방학이 시작됐다.
매년 이맘때면 다람살라에서는 달라이라마의 어머니 디끼체링을 추모하는 축구경기 GCM 골드컵(Gyalyum Chenmo Memorial Gold Cup)이 열린다. 올해 21회를 맞은 GCM은 달라이라마의 생신 80세를 기념하며 인도 전역 티베트 난민지구와 미주 유럽 등지 28개국에서 모인 티베트 청년들이 5월 30~6월 10일 열이틀간 경합을 벌였다. 해외에 이주하여 정착한 티베트 젊은이들이 이번 축구 시합에 참여하면서 달라이라마를 친견하는 행운도 얻었다. 행사 주최에 관한 여담으로 브라질의 축구 영웅 호나우두(1976~)를 이번 행사에 특별 손님으로 초대를 기획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달라이라마는 호주법회를 위해 6월 2일 다람살라를 떠나 2주간의 일정을 소화했다. 호주에 정착한 베트남 불자들을 비롯하여 티베트와 달라이라마를 지지하는 중국 지식인들과의 만남이 진행되었으며 호주 원주민 울룰루(Uluru) 공동체를 방문한 것으로 전해졌다. 반 달라이라마 세력으로 유럽에서 활동 중인 단체 ‘도겔슉덴’은 달라이라마의 법문 장소마다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외신 언론은 국제 슉덴 단체는 6월 29일로 예정된 달라이라마의 잉글랜드 일정에서도 거대 집회를 주도할 것으로 예상했다. 잉글랜드에는 슉덴 단체의 국제 본부가 설립되어 있다. 그들은 달라이라마에게 종교의 자유를 달라고 요구하면서 달라이라마를 공개적으로 비난해왔다.
지금까지 달라이라마의 생일은 서양력을 따라 7월 6일에 기념해 왔다. 그러나 이번 달라이라마의 80세 생일잔치는 실제 생신일 티베트력 5월 5일을 따라 6월 21일 다람살라에서 축하 행사를 열었다. 달라이라마는 18일부터 티베트불교 각 종파의 수장들과 만나고, 21일 티베트중앙행정부(CTA) 주관 하에 장수기도 법회(뗀슉)로서 생신을 기념했다. 이번 만남 동안 후대 달라이라마 옹립과 관련한 타 종파의 의견을 절충하는 사항을 비롯해 각 종파 간 현교와 밀교 수행 체계 교류 협력을 주로 토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달라이라마의 양력 생일 7월 6일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보내는 계획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 뉴욕에서도 달라이라마의 생신을 기념한다. 축하 행사는 7월 내내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로 이어지는 일정이다.
학생과 학승들이 한 자리에 모여 법담과 토론을 나누는 것은 티베트의 오랜 전통입니다. 역대 7대 달라이라마께서도 각기 다른 종파라 하더라도 이러한 법석을 열어 우바새 우바이를 비롯한 모든 학승들이 대론의 장을 열 필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겔룩빠에서는 남걀사원에서 대론 수업을 처음으로 도입하였고 규또와 규메사원으로도 전수되었습니다. 더불어 여승들이 수학하는 사원에서도 대론 수업에 따른 학업의 질적 향상에 대한 결과로서 박사 학위에 해당하는 ‘게쉬’를 인정받게 된 것 역시 돋보이는 성과입니다.
티베트불교가 날란다 승원의 학제를 이어 받아 고차원적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근간은 바로 반야경의 지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 기반의 풍부한 인도 철학을 통합하고 대 학승들을 선지식으로 모신 덕분입니다. 더욱이 스승의 전법을 무조건 받아들이기 전에 의심을 들어 스스로 합당하게 분석하고 증명하며 수행의 차제를 밟아가는 것은 티베트불교의 독자성이기도 합니다. 이는 석가모니 붓다께서 법을 대함에 마치 금을 다루듯 연마하라고 수없이 당부하신 바이기도 합니다.
불법을 수행하는 이가 반드시 경전과 논저를 수학해야 하는 이유는 지식을 통한 사유와 실천이 없이 공성의 지혜를 구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티베트에서 인도로 망명한 이후,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한 티베트인들은 척박한 환경과 생계유지의 어려움으로 불교에 의한 삶의 믿음을 올곧게 조성하지 못했습니다. 불교에 대한 지식이 부재한 탓에 삶 속에서 심적으로나 외적으로 부딪히는 크고 작은 충돌들을 지혜롭게 해결해 나아가기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티베트가 역사적으로 소중히 다뤄오고 보존해온 불교의 지혜들을 간과하게 되거나, 오래되고 낡은 풍습 정도로 치부한 탓에 티베트 불교문화는 왜곡되거나 퇴색하기조차 하였습니다.
티베트불교는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과 시대를 아우르며 심화된 대승불교 이념의 정수를 담은 보고입니다. 8세기 티송데첸 법왕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티베트불교학 체제는 불교의 고전으로서 현대의 정신과학 관련 분야와 통섭하며 지식의 한계를 허물고 보다 폭넓고 풍성하게 고찰하도록 하는 조력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청년 불교도들에게 염주 알을 굴리며 진언을 읊조리게 하고 법당 안에서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의식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시대가 변화했다는 의미입니다. 차별화된 두 분야로 여겨지던 불교 그리고 과학이 지난 30년간 마음과 생명 연구소의 활약을 통해 오늘날 그 접점을 공유하고 불교와 과학의 지속적인 대화로 이어져 가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이는 무척 흥미롭고 바람직한 불교의 진보이자 과학의 혁신입니다. 용첸푼촉의 저서 <마음과 인식>이 불교와 과학 두 분야의 필독서로 오늘날 재조명 되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비언어 의사소통 관련 분야에서 인간의 감정을 연구한 과학자 폴에크먼(1935~)은 인간의 안면 근육을 7천 가지 형태로 분류하였습니다. 한 때 우리의 만남이 무척 흥미진진했던 기억이 납니다. 2000년도 마음과 생명 연구소 학술회의가 다람살라에서 열렸을 때입니다. 그는 나의 표정에 일체 가식이 없고 동시에 집착도 없다고 표현하며 크게 놀랐습니다. 수많은 얼굴을 연구해 왔지만 달라이라마와 같은 얼굴은 처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얼굴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인간의 주요 감정을 파악할 수 있음을 밝혔는데 이는 불교의 심소법과도 연관 지을 수 있는 영역으로 심화 연구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과거 과학에 의해 종교는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는 경고는 무색해져버렸습니다. 더불어 티베트 승려들이 현대물리학이나 정신분석학 등의 분야로 전공을 심화해 가고 있는 바 또한 불교의 또 다른 진보입니다.
우리는 이곳 티베트 망명정부에서 민주주의 체제 하에 자유를 영위하고 있습니다. 부디 우리의 문화를 보존해 주십시오. 학인 여러분들이 성장하여 청년이 되고 노인이 되었을 때 당신들의 후손들에게 대 물릴 수 있도록 티베트의 문화를 소중히 간직해 주십시오. 나는 80세의 노인입니다. 어린 나이에 자유를 잃고 나라 또한 잃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티베트 본토에서 들려오는 비극적인 소식을 접할 때면 그들이 달라이라마에게 의지하는 바가 얼마나 큰가를 앎에도 불구하고, 망명한 신분에서 해줄 수 있는 명확한 것이 없어 비통합니다.
전 세계에 흩어진 티베트인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티베트불교입니다. 달라이라마 역시 티베트불교에 의해서 존립합니다. 더불어 우리 티베트인은 70억 인류의 한 부류입니다. 또한 개개인의 인간은 모두 그들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며 상호 의존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지닌 모두를 존중하고 그들과 함께 더불어 행복하기 위해 스스로 나서서 도울 수 있는 바를 실행해야 합니다.
이번 인도의 폭염으로 1,2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사망자 대다수는 빈곤한 환경에서 도움을 받지 못한 이들이었습니다. 또한 네팔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문화유산이 손실되고 많은 사상자를 낳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은 삶의 희망마저 잃었습니다. 이 시대의 가난이란 무능력의 다른 이름으로 비춰집니다. 최근 버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교와 무슬림 간의 충돌을 보면서 지도자의 역할과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 탈출한 로힝야족들이 국경 심사에서 허가를 받지 못하자 태국과 말레이시아로 진입을 시도하면서 또 다른 분쟁을 야기했고 급기야 종교 간의 충돌로 번졌습니다. 어찌 종교의 이름으로 이러한 비극이 벌어질 수 있단 말입니까.
인간은 인류로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얼마 전 나의 벗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와 ‘기쁨’을 주제로 한 대화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그 어떠한 경우의 살육은 당장 멈춰야 한다.”는 바에 동의하였습니다. 또한 이생이 더불어 행복하도록 국민을 보살피는 것은 지도자의 의무입니다. 지도자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정의하는 바에 걸맞게 인류와 생태가 더불어 행복할 수 있도록 정의를 선도해야 합니다.
타인을 돕고자 하고 돌보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은 보리심을 깨우는 동기입니다. 불교는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지만 신은 사랑이라고 하는 의미를 헤아려 사랑으로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살아가도록 합니다. 왜 우리는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이 불교도가 되기를 기도하지 않고 왜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서원하는 것일까요? 개종은 절대 실용적인 선교 방식이 아닙니다. 석가모니 붓다께서도 생존 당시 타 종교인들에게 불교만이 진리이며 유일하다고 설법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의 선교단체들이 십자가를 뒤에 숨기고 진보된 교육과 식량을 앞세워 개종 행위를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가까운 벗에게 제안해 보세요. “우리가 70억 인류를 위해, 공공의 선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치를 실천해 보자.”
나는 티베트의 달라이라마입니다. 여전히 90% 이상의 티베트인들이 달라이라마를 지지하고 의지합니다. 나의 생이 끝나는 그 날까지 티베트의 정의와 평등이 실현될 수 있도록 헌신할 것입니다. 티베트의 현안에 공감하는 것은 인류가 처한 문제와 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폭력과 사랑을 실천할 때는 상대가 불교도이거나 비불교도이거나 무종교인이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행복을 원하는 같은 인간이라는 입장에서 차별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