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스님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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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불자로서의 자부심
달라이라마, “그대. 수미산 아래 욕계중생이여”

삼독의 번뇌를 여의도록 기도를 올리오니.
마음을 전도시키는 뿌리가 무엇인가.
지혜의 빛으로 그 근본을 밝히소서.
일체 본래의 진여의 공성을 깨우치도록 하소서.
다람살라의 청명한 가을 대만에서 천여 명의 불자들이 달라이라마(뗀진갸초, 81)께 전법을 권청하였다. 올해 달라이라마의 대만 방문을 기대하였으나 결국 대만정부의 긍정적 반응을 얻지 못하자 인도를 찾은 것이다. 산골 마을의 크고 작은 호텔들은 남은 방을 찾기 힘든 상황이 벌어질 정도였다. 달라이라마를 근본 스승으로 대만에서 출가한 비구와 비구니 승려만 180명이 참석을 하였다. 몽골에서도 동자승 이백여 명이 이번 법회에 동참하여 눈길을 끌었다.
항시 달라이라마가 자부해온 티베트불교의 가치가 있다. 무자성법을 추론하는 삼단논법의 학풍이 티베트불교의 인명학을 통해 꽃을 피운 바가 그러하다. 나란다승원의 17논사의 법통을 이어 받음에 달라이라마는 항시 선지식의 나라 인도를 향해 존경과 예의를 표해왔다. 붓다가 태어나신 이 땅에서 수천 년간 붓다의 법을 이어가겠다는 사명감으로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법제자들을 치하했다. 달라이라마는 더불어 당부하기를 붓다가 항시 강조하였던 철학적 관점들을 항시 소중히 여기고 올곧게 전승하기를 바랐다.
10월 3일부터 6일까지 사흘간 열린 법회에서, 달라이라마는 용수(나가르주나) 논사의 수제자 성천(아리아데바) 논사의 사백론을 설하였다. 법의 근간은 스승 꾸눌라마린포체로부터 사사받은 것임을 밝혔다.

불교도로서 법을 듣고 사유하고 실천하기 위한 일상의 도로써, 우리는 스승으로부터 법을 듣고 사유하여 수행의 뼈대로 삼습니다. 그 시작은 내면의 탐 진 치를 법으로써 이해하고 스스로의 수행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려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찾고자 하는 공성의 지혜를 밝히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이 여섯 가지의 바라밀행입니다. 불법을 기반으로 궁극의 번뇌장과 소지장을 여의고자 한다면 근간이 되어야 하는 바가 바로 보리심입니다. 굳건한 보리심으로 말미암아 보살행을 하였을 때 비로소 일체의 장애를 여읠 수 있습니다.
공성을 주제로 설한 붓다의 경전을 반야부라고 통칭합니다. 그 분야를 대표하는 논사 용수보살의 논서를 통해 현관의 공성과 은희 차제를 체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과거 나란다승원의 스승들이 지구의 중심에 수미산이 있다고 주장을 한 바에 대해서 현대의 과학은 그 오류를 명백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불법을 수행하는 이는 표면적인 지식의 수준에서 한 단계 진보하여 과연 수미산을 통해 증명하고자 했던 본래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를 보다 심층적으로 의문을 들고 당시에 사유되었던 지식의 체계를 분석하고 오늘의 지식에 맞추어 재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가에서 흔하게 주고 받는 말로 중생의 마음이 왜 괴로운가를 물으면 번뇌가 있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수미산 아래 산다는 욕계의 중생들은 붓다를 통해 과연 어떠한 평안을 얻으려 했을까요. 우리는 이 자리에서 붓다께서 중생에게 어떠한 이유로 법을 설하셨는가를 헤아려 보고자 합니다.
윤회를 하는 원인이 무엇인가. 그로써 벗어났을 때 이룬다는 열반이란 무엇인가. 열반을 이루기 위해 행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의심의 여지 없이 붓다가 설하신 네 가지의 고귀한 진리에 그 실상이 모두 담겨있습니다. 색 수 상 행 식이 공함을 사유하고 분석하였을 때는 그 자성의 실체조차도 없음을 살필 수 있는 근기가 되어야 합니다.
현대과학의 양자물리학 분야에서 고유 입자의 성질이 없음을 증명한 바에 대해 불교의 무자성 공사상과 많은 부분 상통함에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불교에서는 ‘나’의 주체가 없다면 수 상 행 식 조차도 없다고 해석합니다. 인식의 행위와 인식을 행하는 자가 없음을 알아차림을 통해 일체법의 무자성한 공성에 대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성에 대해 논할 때 항시 그 예로 강조해온 중론의 18장에 일컫기를, ‘업과 번뇌로써 모든 분별이 생기며 이 분별로 인해 희론이 생하네. 이 모두를 완전히 여의고자 한다면 공성을 사유하라’고 하였습니다. 더 이상 원하지 않는 고통의 실체를 알고 그 원인을 파헤쳐 근본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 수행자가 반드시 숙지해야 하는 게송 가운데 하나입니다.
윤회를 하게 만드는 업과 번뇌가 분별을 일으킵니다. 이는 희론을 만들어 내어 내가 사유하고 행동하는 일상에서 온갖 망상을 파생시킵니다. 나로써 파생된 망상은 내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인과 공동체를 물들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모두 공업 중생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상대적으로 어떠한 대상을 보았을 때 혹은 집착을 일으킴을 통해 생하는 바가 윤회의 독으로 해석되는 탐 진 치입니다. 여기서 잠시 화를 내는 사람의 마음 작용을 살펴봅시다. 화라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가 그 방향성을 그려 봅니다. 상대의 잘못 보다는 나 본인의 마음에서 상대의 허물을 과장 시키는데 그 원인의 상당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화가 나서 일으키는 부정적인 감정을 만들어 내는 내 마음을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인간은 상대에게 의존하지 않고 나만의 독단적인 삶을 실현해 갈 수 없습니다. 수행을 하는 이라면 더욱이 불법에 믿음을 일으킨 이라면 오욕의 집착으로부터 해방이 되는데 생활의 나침판을 맞춰야 합니다. 공성을 배우고 사유하며 실천한다면 그 누구나 실현할 수 있는 가치입니다.
‘공을 바로 보고 싶다’고 서원하는 수행자들에게 항시 당부하는 바가 있습니다. 삶에서 얼마만큼의 사랑을 실천하는가를 스스로가 여유 있게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조언하는 바가 그것입니다. 대부분의 수행자라고 본인을 수식하는 이들은 자아를 극도로 사랑한 나머지 반연을 일부러 거부하거나 소홀하게 대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보리심의 싹을 띄우려는 불제자들에게 중생의 세계란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이나 무한하고 또한 다양한 성품을 지니고 있음을 알아차리기를 조언합니다. 불법을 통해 경계 없이 품에 안을 수 있는 사랑과 자비심을 일깨우기를. 나와 함께 더불어 오늘을 윤회하는 그들 역시 충족되는 법열을 체험하고 실질적으로 공동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그 무엇의 가치를 위해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염원하는 반야의 정수, ‘아제 아제 바라 아제 바라 승아제 모지 사바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