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사 회주 정우스님이 일본 쇼교지(정행사)를 다녀오신 후 정행사 회주 지묘스님이 정우스님 앞으로 참배기에 대한 감사의 인사말을 보내셨습니다.
등록일 : 2026-04-11 동영상 

3월 28일, 한국 구룡사의 정우 예하(통도사 27대 주지)께서는 현문 예하(동 26대 주지), 영배 예하(동 29대 주지)와 동행하시어, 쇼교지(正行寺, 정행사)에서 의뢰했던 사명대사의 위패를 제작하여 모시고 방문해 주셨습니다. 한국에서 '불법승' 의 '불보사찰'로 일컬어지는 통도사의 전 주지 세분스님께서 한꺼번에 산사(쇼교지)를 방문해 주신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습니다.













특히, 정우 예하께서는 지난 3월 18일에 모친(법명 대자화)께서 서거하신 직후, 아직 중음(中陰, 49재 기간) 중인 10일째 되는 날에 방문하셨습니다. 모친의 향년은 102세로, 그야말로 천수를 누리신 생애였습니다. 정우 예하께서 출가하신 것은 15세 때로, 모친께서는 아들의 출가 사실도 모른 채 홀몸으로 다른 여섯명의 자녀를 키우셔야 했던 고난의 인생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예하께서는 가장 말년에 정우 예하가 창건하신 구룡사의 한 신도로서 남몰래 뒷바라지해 오신 기간이 모친의 생애 중 가장 행복하셨을 것이라고 회고하셨습니다.

일행을 맞이하는 저희 승가에게 있어서도 청년들의 입학과 졸업이 겹치는 시기였고, 승가 안팎의 인사 이동으로 분주했으며, 춘안거, 런던 스프링 스쿨, 눈앞에는 영대경 법요, 도쿄 도장 창립 50주년 법요, 본산 어원기 법요 등도 다가오고 있어, 시간 감각이 날아갈 듯한 '조기 내영(早来迎)'과도 같은 일대 법요를 맞이한 것 같았습니다.

돌이켜보면, 과거 두 번에 걸친 정우 예하와 저 자신의 세속을 초월한 만남이 떠오릅니다.

첫 만남은 1999년(평성 11년) 2월 10일, 에카이(恵契) 스님께서 한 세기를 다 사시고 왕생하셨는데, 그로부터 2주 후, 즉 중음 2재 날에 정우 예하께서 쇼교지 경내에 처음 발을 들여놓으셨을 때였습니다.

에카이(恵契) 스님의 임종 날은 쇼교지 건립 기념일 당일이었기에, 종가 아소 신사의 고레유키 궁사님을 필두로 원거리의 신도들도 대부분 시간에 맞춰 도착하여 마음껏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장례 후 정리를 거의 마쳤을 무렵, 평소의 승가와는 전혀 다른 경내에 홀로 서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을 때의 공허함과 끝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잊을 수 없습니다. 큰 은혜를 입은 스승 에카이(恵契) 스님의 임종은 아직 미망 속에 있는 저에게 결코 대왕생이라고 찬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오직 '대비심(大悲心)'이라는 세 글자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천지자연은 한시도 쉬지 않아 매화가 피어나고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불법을 전해준 은혜의 나라 한국의 정우 예하 일행이 온화한 미소와 함께 산사 안에 존안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 만남은 제 어머니의 왕생 후였는데, 이때도 중음 2재째 날이었습니다. 정우 예하께서 어머니를 위해 온몸에 땀을 흘리시며 "아미타경" 한 권을 독송해 주셨을 때입니다. 어머니의 왕생은 2012년(평성 24년) 10월 22일, 98세의 일기였습니다. 그 왕생은 너무나도 허무하여, 절 안에 있으면서 사모(주지의 아내)는 임종을 지켰지만 저는 한순간의 지체로 임종을 지키지 못한 채 그대로 이별한 듯한 허탈감이 있었습니다.

설령 어머니의 왕생을 지켜보았다 하더라도, 형용하기 어려운 아쉬움은 떨쳐버리지 못한 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일찍이 제가 어머니께 청문(불법을 듣는 것)을 권하여, 이를 받아들이시고 첫 이레(초칠일)의 청문 자리에 앉아 계셨을 때의 일입니다. 문법(聞法) 중에 어머니의 방을 찾아 표정을 살폈을 때, 오히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찬 표정을 발견한 순간 혹시나 분수를 넘은 행동이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고통이 스쳤고, 그 일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임종 당시의 어머니께는 2주 앞으로 다가온 성인 750회 어원기 법요 및 대비원 스님의 13주기에 참석할 수 있기를 애타게 기다리셨을 텐데, 끝내 그 훌륭한 인연의 날에는 닿지 못하셨습니다.

그때 저 세상에서 '매나 송골매가 날아오르듯(如鷹隼飛)' 정우 예하께서 일부러 어머니의 중음 자리까지 내려오시어 기도를 담아 "아미타경" 한 권을 독송해 주셨습니다. 그 순간, 어머니를 진심으로 극락정토로 보내드렸다는 실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정우 예하께서는 독경 후, "저는 온 힘을 다해 염불했습니다. 그러자 "아미타경" 에서 큰 반응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 모친의 중음 중에 왕림해주신 정우 예하와 잠시 두 손을 맞잡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최근 히노사토의 '정신게 회좌'에서 부인들이 나눈 기탄없는 대화 내용 때문입니다. "여성은 출산할 때 최고의 행복을 느낍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와 떨어지는 외로움도 있습니다"라는 어머니의 본심을 접하게 되어, 남성 신도들에게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 충격적인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태내의 아이와 10개월 동안, 생명 원형의 탄생부터 심신의 형태와 질서가 형성되는 한 개체의 완성까지 말 그대로 밀착하고 계속 포용하며 밤낮없이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으므로, 이 관계는 아버지와 아이의 관계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와 아이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분별적이고 상대적인 관계이며, 부자간의 마음의 교감이 시작되는 것은 아이가 겨우 옹알이를 시작할 무렵부터입니다. 반면, 태내에 아이를 잉태한 어머니는 일체적이고 전체적이며,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문자 그대로 감성 중심의 생명 본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문의 색채가 짙고 아직 친족을 위한 독경도 허용되지 않는 한국에서 쇼교지를 방문하신 정우 예하께서는 모친을 위해 염불 승가가 거행한 감은의 중음 법요에 심신이 흠뻑 젖어 계셨습니다. 정우 예하의 감사하는 마음은 끝을 모른 채,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제 손을 꽉 쥔 채 놓지 않으시며 감격의 눈물과 함께 염불을 계속 외우셨습니다. 저 자신도 예전 어머니를 대하던 태도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에도 반대 의사를 표명한 적 없고 특별한 주장도 없이 마지막에도 묵묵히 떠난 어머니셨지만, 그 밑바탕에 흐르던 여래의 '원(願い)'을 뵙는 것이 이번에 처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저 '살아온'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만으로도 '원'이 담겨 있으며, 지금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저 '키운' 것이 아니라, 거기에도 '원'이 담겨 있어, 지금도 계속해서 키워주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환언하면, 그것은 여래의 '본원(本願)' 그 자체입니다.

정우 예하께서는 내진을 이동하시던 중, 재빠르게 성인의 영정에 적혀 있는 천친보살의 '불허작주지(不虚作住持)' 게송에 눈길을 멈추시고는 "가슴에 사무치는 내용이군요"라며 한동안 합장하고 응시하시더니 한층 더 얼굴빛이 빛나셨습니다.

"정토론"의 불장엄공덕성취는 다음 네 구절의 게송으로 되어 있습니다. "관불본원력 우무공과자 능령속만족 공덕대보해(觀佛本願力 遇無空過者 能令速滿足 功德大宝海)"라고 말입니다. 이는 '불허작주지공덕'의 게송(헛됨 없는 국토를 건립하고 계속해서 지탱하시는 여래 공덕 완성의 시)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이 큰 공덕을 한 몸에 입게 된 것은 오로지 정우 예하의 기쁨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동행하신 현문 예하, 영배 예하께서는 정우 예하의 소년 시절, 같은 시기에 출가하신 둘도 없는 벗이라고 들었습니다. 좋은 벗과 혈연이신 모친을 둘도 없는 증명자로 동반하시어 히코산 명호산까지 오르셨고, 세 분의 큰스님께서는 각각 내불(內佛)의 방에서 명호를 휘호하시어, 영대 안치할 명호 기둥을 명호산에 남겨두고 기쁜 마음으로 고국으로 귀환하셨습니다.





쇼교지(일본 후쿠오카 정토진종 정행사) 지묘(智明) 합장

あとがき
三月二十八日、韓国九龍寺・頂宇猊下(通度寺二十七代住持)は、猊下(同二十六代住持)、猊下(同二十九代住持)を相伴い、正行寺より依頼していた四溟大師の御位牌を制作・奉持して来訪いただきました。

韓国で '佛法僧'の三大本山の筆頭、'佛の本山'と称される通度寺の元住持方三師が、打ち揃って御来山頂くとは、前代未聞の出来事でありました。
とりわけ、頂宇猊下におかれては、去る三月十八日に御母堂(法名・大慈華)が御逝去の直後、未だ中陰中の十日目の来寺であります。
御母堂の行年は百二歳で、まさに天寿を全うしての御生涯でありました。

頂宇猊下が、出家されたのは十三歳、御母堂は我が子の出家も知らされぬまま、女手ひとつで、他の四人の御子たちを育てられたという苦難の人生であったと伺いました。

最晩年は頂宇猊下が創建された九龍寺の一信徒として、密かに支えて来られた期間が、ご生涯の中で最も幸せであったと猊下は回顧されました。

御一行をお迎えする私どもサンガにとっても、青年達の入学・卒業が重なる時季、サンガ内外の人事異動も慌ただしく、春安居、ロンドンのスプリング・スクール、目前には永代経法要、東京道場創立五十周年法要、本山御遠忌法要も迫っていて、時間感覚が吹き飛ぶ '早来迎' さながらの一大法要を迎えたようでした。

振り返って、過去二度に亘る頂宇猊下と私自身との超世の出遇いが想起されます。

最初の出会いは平成十一年二月十日、恵契様は一世紀を生き切られての御往生でしたが、その二週間後、即ち中陰二七日の日に頂宇猊下は正行寺の境内に初めて足を踏み入れられました。

恵契様の御臨終の日には、正行寺建立記念日の当日であり、宗家. 阿蘇神社の惟之宮司様を筆頭に、遠隔地のご同行もほとんどが間に合い、心ゆくまで最後のお別れを遂げることができました。

葬儀の後の片付けを、ほぼ終えた頃、平生のサンガとはまったく異なった境内に佇んでいる自分に気付いたときの、空虚感と底知れない怖畏の念を忘れることはできません。

重恩の師・恵契さまの最期は、未だ迷妄の中にある私にとって、決して大往生と讃仰できるものではなく、唯、'大悲心' の三字をもってしか表わせませんでした。

しかし、天地自然はひと時も休息なく、梅花はほころび、温かい日差しが降り注ぐ中、佛法伝持の御恩の国、韓国の頂宇猊下の御一行がにこやかに山内に御尊容を現されたのでした。

出遇いの二回目は、私の母の往生後、このときも中陰二七日目でした。

頂宇猊下は母の為に全身に汗をかきながら"阿弥陀経" 一巻を拝読していただいた時のことです。

母の往生は平成二十四年十月二十二日、九十八歳の一期でした。

その往生は、余りにあっけなく、寺内におりながら、坊守は間に合いましたが、私は一瞬の遅れで間に合わず、そのままお別れしたような虚脱感がありました。

たとえ、母の往生に立ち会えたとしても、名状しがたい心残りは払拭できないままにいたはずです。
それは、曾て私が母に聴聞を奨め、それを受けて若七日の聴聞の座に着かれていた折のことです。

聞法中に母の部屋をたずね、その表情を伺った時、むしろ遣る瀬ない悲しみに充ちた表情を認めた瞬間、若しや分限を越えた振る舞いであったのではという痛みが走り、そのことが脳裏から離れないままでいました。

臨末時の母にとって、あと二週間と間近に迫っている聖人750回御遠忌法要及び大悲院様十三回忌に参席できることを待ち望んでいたはずですが、ついに御勝縁の日には届きませんでした。

そこに彼土より「如鷹隼飛」の如く頂宇猊下が、態々母の中陰の席まで降りてこられ"阿弥陀経" 一巻を祈りを込めるように読誦して下さいました。

その瞬間、母を心底から御浄土へと送らせてもらたった実感を懐くことができました。

頂宇猊下は読経後、私は力一杯に勤めました。すると、"阿弥陀経" に、大きな手応えのようなものを感じました」と仰せられました。

この度、御母堂の中陰中に御来駕いただいた頂宇猊下と、暫く手を握り合って語るうちに気づかされる事がありました。

最近の日の里 '正信偈会座' で交わされた婦人方の忌憚ない談合の内容です。

'女性は出産のとき、最高の幸せを感じます。しかし同時に子どもと離れる寂しさもあります」との母親の心底に触れ、男性同行にとっては初めて聞く話で衝撃的な印象をうけました。

それは、胎内の子どもと十か月間、生命の原型の誕生から心身の形と、秩序が形成される一個体の完成まで、文字通り密着し、包容し続け、昼夜不断に対話し続けているのですから、この関わりは、父親と子どもとの関係とは次元が違うと認めざるを得ないと思いました。

父親と子どもの関係は、何処までも分別的・相対的関係であり、父子の心の通いがはじまるのは、子どもがやっと片言を喋り初める頃からです。

一方、胎内に子どもを宿す母親は、一体的、全体的であり、なべて云えば、文字通り感性中心の生命本体であると言えます。

聖道門の色彩が濃く、未だ親族のために読経も許されていない韓国から、正行寺を訪ねられた頂宇猊下は、御母堂のため念佛サンガ挙げての感恩の中陰法要に心身共に浸っておられました。

頂宇猊下の感謝の念は尽きるところを知らず、自らの胸に手を押しあてて、私の手を握りしめて離されず、感涙とともに念佛を称え続けられました。

私自身、かつての母への姿勢を照らされるものがありました。

何につけても反対を表明することもなく、特段の主張もなく、最後も黙して逝った母でしたが、その底に流れていた如来の「願い」を拝することがこの度初めて叶いました。

ただ '生きてきた'のではなく、ただそれだけで'願い' が込められており、只今、生かされていることを知らされます。

ただ'育てた' のではなく、そこにも'願い'が込められて、今も、育て続けているのでした。
換言すれば、それは如来の"本願"そのものであります。
頂宇猊下は、内陣移動中、目ざとく聖人の御影に記されている天親菩薩の'不虚作住持'の偈文に目を留められ、'胸に染みる内容ですね'と暫く合掌、凝視され、一入顔容を耀かされてました。

浄土論" の佛荘厳功徳成就は、以下の四句の偈文となっています。

'觀佛本願力 遇無空過者 能令速滿足 功德大宝海'と。

これは'不虚作住持功徳'の偈(虚しさのない國土を建立し、支え続けられる如来功徳の完成の詩)といわれますが、この大功徳を一身に被りましたこと、偏に頂宇猊下の喜びに接した故であります。

同伴された玄門猊下、英培猊下は、頂宇猊下の少年時代、同時期に出家されたかけがえのない朋友とお聞きしました。

善き朋友と、血縁の御母堂とを無二の証誠者として伴われ、英彦山名号山まで登られ、三尊師は各々、御内佛の間で名号を揮毫され、永代安置の名号柱を名号山に遺留して、勇躍母国へ帰還されました。

​日本福岡、浄土真宗 正行寺 智明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