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수행자 '수좌 명진' 우주 무념으로 돌아가다
등록일 : 2026-08-26 동영상 

수좌 명진 스님이 삶과 죽음이 단절되지 않은 공간에서 속세와 별리했다. 사회의 낮은 곳을 수행처로 세상을 품고 물러섬 없는 행동으로 시대를 이끈 전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은 우주의 무념으로 돌아갔다.

25일 오전 서울 강남구 봉은사에서 종교·시민사회장으로 엄수된 명진 스님의 영결식에는 스님의 출가 본사인 법주사 문도와 불교계 인사들을 비롯해 종교계, 시민사회, 학계 인사 등 사부대중 1천여 명이 참석했다.

조계종 총무원장 권한대행 정문 스님, 37대 총무원장이자 38대 총무원장 후보자 진우 스님, 중앙종회의장 주경 스님, 탄성문도회 문장이자 장의위원장 도공 스님, 38대 총무원장 후보자 경우 스님, 구룡사 회주 정우 스님, 전국선원수좌회 상임대표 불산 스님, 기본선원장 영진 스님, 성불사 회주 도서 스님, 총무원 기획실장 묘장 스님 등 부실장 스님,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 보문사 주지 원경 스님, 대전사 주지 법일 스님, 중앙종회의원 진각·호암·보화 스님 등 종회의원 스님, 전 포교원장 혜총 스님, 사단법인 평화의길 제주지부장 도정 스님(남선사 주지) 등 종단 주요 인사들이 명진 스님과 작별했다.

종교 및 시민사회에서 염무웅 전 국립한국문학관 관장,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 함세웅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고문, 정부자 세월호 유가족 대표, 이희선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이 참석했다. 전관계에서 홍익표 청와대 정무수석, 송영길·주호영·김현 국회의원, 권영국 정의당 대표, 추미애 경기도지사, 전재수 부산시장이 참석했다. 분향소인 선불당과 영결식장 주변은 1시간 전부터 애도 인파가 몰려 발디딜 틈이 없었다.

영결식은 일감 스님의 사회로, 명종 5타로 시작했다. 이후 개식, 삼귀의례, 영결법요, 행장 소개, 추도입정이 이어졌고 영결사와 추도사, 추도시, 조가, 문도인사, 헌화, 사홍서원, 발인으로 마쳤다.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본사 법주사 진공당 탄성문도회장이자 장의위원장 도공 스님은 영결사를 통해 명진 스님을 “말에 거침이 없고 행동에 물러섬이 없었던 스님”이라며 “스님이 있어 속리산 법주사에도 금오·월산 선사로 이어지는 꼿꼿한 수행 가풍이 살아 있음을 자랑할 수 있었고, 스님이 있어 사회 변화에 눈뜬 행동하는 실천가가 우리 종단 안에도 있음을 돌아볼 수 있었다”고 추모했다.

도공 스님은 명진 스님이 사회운동과 종단 개혁에 나서면서도 수행자의 본분을 놓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명진 스님은 출가 후 50안거 이상을 성만했다.

도공 스님은 “사회운동을 하고 종단 개혁을 외칠 때도 출가 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방부를 들이고 철마다 선방에 앉아 수행 정진했다”면서 “수좌 명진 스님에게는 사회운동도 종단개혁도 수행의 방편이었고, 그 자체가 수행임을 스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체득한 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던 손길 같던 스님이며, 수행이 깊어지면 자비심도 함께 깊어져야 참된 수행이라고 생각한다. 명진스님의 수행은 아무나 따라갈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고 추모했다.

시민사회대표로 영결사를 한 염무웅 전 국립한국문학관 관장도 명진 스님을 “52년을 승복 입은 비구로 지냈으나, 그의 삶은 승복의 격식에도 사찰 건물의 고고함에도 갇히지 않았다. 그는 자유인이었다. 제도와 관행은 그를 가두지 못했다. 정권의 탄압과 종단의 만류도 그를 어쩌지 못했다.”면서 “그는 언제나 힘없고 기댈 것 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들이 믿고 위로받을 수 있는 의지처가 되었고, 억울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소식이 있으면 지체없이 그들 곁으로 달려가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했다.”고 회고했다.

대구의 한 대학 재직 시절부터 40여년 간 인연을 맺었다는 염 관장은 “그가 말하는 이야기는 겉보기 평범한 가운데 삶의 근본을 겨냥하는 열망을 담고 있었다. 저는 바로 그날로 명진 신도가 됐다. 저 말고도 수많은 분이 명진 스님으로부터 위로받고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라면서 “그는 알아듣기 어려운 불법을 강설하지 않으셨다. 그는 자신이 한세상 겪으면서 실제로 겪은 일들을 가지고 누구나 알 수 있는 말로 재미를 섞어 이치를 따졌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 평범함이 만인의 심금을 울렸을까요. 그 비밀은 명진 스님이 높은 곳, 먼 곳이 아니라 늘 바로 우리의 삶과 같은 높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의 행보 그대로 바람처럼 표연히 떠나신다. 못 가신다고 잡고 싶은 마음을 못내 누르고 차마 소매를 놓는다.”이라고 했다.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는 추도사를 통해 명진 스님이 1985년 해인사에서 광주민주항쟁의 참상을 접한 뒤 선방의 문을 열고 세상 속으로 나온 일화를 소개하고, 이후 민주항쟁과 종단 개혁의 현장에 섰고,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세월호·용산참사 유가족, 비정규직과 산업재해 노동자들의 곁을 지킨 거리의 수행자로서의 명진 스님을 회고했다.

김 교수는 추도사에서 “스님은 ‘모든 존재는 하나의 몸(同體)과 같아 타인의 고통을 곧 나의 고통으로 여기고, 깊은 슬픔으로 그를 구제하고자 하는 마음’이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실천이야말로 참된 수행(修行)이라고 말씀하셨다”면서 “그 말씀 그대로, 스님은 언제나 낮은 곳을 향해 걸으며 강한 자에게는 준엄히 꾸짖고 약한 자는 두 손 잡아 일으켜 세우는, 억강부약(抑強扶弱)의 진정한 기수로 살아가셨다.”고 했다.

이어 “동체대비를 몸으로 실천한 수행승이셨고, 억강부약의 참된 기수이셨던 스님. 이제 법주사의 다비 불길 속에서 육신은 재가 되어 흩어지겠지만, 당신께서 남기신 크나큰 정신은 밤하늘의 별이 되어 앞으로도 우리의 길을 비추어줄 것”이라고 추모했다.

조게종 기본선원 조실 영진 스님은 명진 스님을 “조계종 선방 납자들의 지남이었고, 종단의 미래를 밝히는 개혁가였으며, 우리 사회 약자들을 살피는 관음의 화신”이라고 했다.

이어 “일찍이 법주사와 해인사, 그리고 봉암사를 비롯한 전국의 선방에서 용맹정진의 신화를 만든 선풍도인이었다”면서 “제방에서의 수행력과 선문답은 지금도 많은 선객들의 가슴을 울리는 자취이다. 스님이 군사정권의 불의를 목격하고 민주화의 길을 나서게 되었고, 사회 운동가가 된 스님은 위정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언변과 행보로 폭압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고 회고했다.

영진 스님은 “우리 수좌들은 그 어떤 권위와 관습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깨달음의 지혜를 갈구하는 수행자들”이라면서 “수좌 명진이 종단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의 거리를 노닐다 영원한 대자유의 길로 나아갔다. 어두운 거리에서,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의 현장에서, 녹슨 철조망 위에 당신이 있었으니 그 어느 곳이 선방이며 그 어느 곳이 저자거리입니까? 우리도 불퇴전의 기세로 오직 부처의 길, 깨달음의 길을 묵묵히 이어가겠다.”고 추도했다.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는 '영산의 춤'이란 제목의 추도시를 통해 명진 스님과 생전 나눴던 기억을 풀어냈다. 김 교수는 추도시에서 “그대는 죽는 순간에도 살아있었소. 죽는다는 생각의 찰나도 없이 적멸보궁으로 들어가 버렸소. 아하앙~ 한마디만 쓴소리 해야겠소 大兄의 해탈은 욕심이었소 그러나 수없이 선한 인연을 지어 중생을 대승大乘에 오르게 하는 욕심이었기에 봐주겠소. 그러나 나는 괴롭소 나는 슬프오 나는 외롭소”라면서 “코뿔소의 고독을 두 배로 씹어야 하니까.”라며 명진 스님과 별리를 슬퍼했다.

영결식에서는 각계 인사들의 조사도 이어졌다. 함세웅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고문, 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 상임대표 불산 스님, 정부자 세월호 유가족 대표, 이희선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전재수 부산시장이 차례로 고인을 추모했다.

소리꾼 장사익은 ‘낙화’라는 제목의 노래를 추도가로 부르고, 봉은사 합창단의 조가가 이어졌다. 조계종 스님들과 유가족, 시민사회, 신도대표 등이 차례로 헌화했다. 이후 문도대표 선용 스님의 인사와 사홍서원을 끝으로 영결식을 회향하고, 유발상좌 유병문 씨가 명진 스님의 영정을 들고 발인 행렬을 이끌었다.

명진 스님의 법구는 영결식 후 충북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로 운구했다. 고인의 출가 본산인 법주사에서는 이날 오후 3시께 다비식을 엄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