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退翁堂 性徹大宗師 行狀
圓覺이 普照하니 寂과 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萬物은 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眞理가 따로 없으니 아아, 示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宗門의 바른 안목을 갖춘 性徹大宗師께서는 본디 굳세고 우뚝하시어 그 모습은 고고하고 청수하며 생각과 사려는 호수처럼 고요하시니, 戒法과 禪定의 行履는 인간 천상에서 엿볼 수 없고, 慈悲의 妙用은 일체 중생이 다 함께 우러러보았다. 한 말씀 한 구절과 한 기틀 한 경계에 人天의 眼目을 여시니, 어느 때는 棒喝의 本分手段으로써 납승을 제접하고, 어느 때는 三玄三要와 四料揀 四賓主의 臨濟宗旨로써 向上一路를 闡揚하여 獅子吼를 吐하시니 이는 祖佛의 행리이고 이 시대 乾坤 獨步의 禪機를 떨침이었다.
退翁堂 性徹大宗師께서는 1912년 任子 陰 2월 19일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陜川李氏 家門에서 태어나시니, 嚴父는 尙彦이시고 慈母는 晉州 姜氏이시며 俗名을 英柱라 하였다. 유년에 小學校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資治通鑑을 마친 뒤로는 남에게 더 이상 배운 바 없이 스스로 학문을 대성하셨다. 일찍이 소년시절부터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모든 經書와 新學問을 두루 섭렵하였으나, 眞如의 문에 들어가는 길이 아님에 공허함을 느끼던 즈음 한 노스님으로부터 永嘉大師의 證道歌를 받아 읽고 홀연히 心眼이 밝아짐을 느꼈다. 20세 전 후 불교에 심취하여 지리산 大源寺 塔殿에서 정진한지 40여일만에 문득 마음이 밖으로 달아나지 않고 話頭가 動靜一如에 이르게 되었다.
화두참선에 확신을 가지고 1936년 丙子 봄 25세에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가야산 해인사로 떠나면서 出家詩를 읊었다.
彌天大業紅爐雪이요 跨海雄基赫日露라 誰人甘死片時夢가 超然獨步萬古眞이로다.
그 해 봄 해인사 白蓮庵에서 東山스님을 은사로 受戒得度하고, 같은 해 雲峰和尙으로부터 比丘戒를 수지하였다. 이후 梵魚寺 金魚禪院, 金剛山 摩訶衍 등 남북 제방선원에서 안거하셨으며, 29세 때 대구 桐華寺 金堂禪院에서 마침내 漆桶을 打破하고 悟道頌을 읊었다.
黃河西流崑崙頂이여 日月無光大地沈이라 遽然一笑回首立하니 靑山依舊白雲中이로다.
이후 10여년간의 행각 중에도 長坐不臥로 고행 정진하시니, 언제나 안목이 투철하여 그 禪機를 당할 자가 없었다. 8.15 광복 직후 문경 鳳巖寺에서 共住規約을 만들어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높이 드니, 性徹 牛峰 靑潭 慈雲 香谷 普門 月山 道雨 性壽 慧庵 法傳 등 大德들이 동참하여 佛祖의 正法을 發揚함으로써 敎團淨化의 礎石을 다졌다. 1955년 교단정화 후 초대 해인사 주지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시고, 팔공산 聖殿庵으로 옮겨 철망을 치고 10년을 洞口不出하며 道光을 숨기셨다.
1967년 伽倻山 海印叢林 초대 方丈에 추대되시고 百日法門을 열어 無量衆生을 濟度하기 시작하셨다. 1981년 大韓佛敎曹溪宗 第6代 宗正에 추대되시고 1991년 제7대 종정에 재추대되셨으며, 宗門의 이론서인 禪門正路를 저술하고 上堂 法語集인 本地風光을 발간하시고는 부처님께 밥값 하였다고 흔연해 하셨다.
이후 스님의 말씀과 종문의 핵심 어록에 대한 스님의 강론을 엮은 10여종의 책과 스님께서 몸소 선정하여 번역하게 한 선종의 주요 어록 37권을 함께 묶은 禪林古鏡叢書를 발간하니, 宗通과 說通을 겸비하신 스님께서 현대 한국선종에 끼치신 바는 참으로 크다 하겠다. 또 스님께서는 종단행정에는 일체 관여치 않으시고, 國政諮問委員에 위촉되었으나 전혀 나아가지 않으시며, 산승은 오로지 청산에 머물 뿐이라고 하셨다.
結制 安居 중에는 산중에 비구, 비구니를 비롯한 四部大衆이 항상 5백명이 넘게 雲集하여 精進하였으니, 오늘날 동양 삼국에 이와 같은 예는 없다 할 것이다. 매 결제 철마다 대중이 함께 참여하는 七日 七夜 勇猛精進은 철저한 수행정신을 진작시키고 曹溪門下의 禪風을 드날리게 하는 스님의 매서운 家風을 이루었다. 스님께서는 선종의 바른 이념이 六祖 慧能의 頓悟頓修思想에 있음을 밝히시고, 8백년 동안 한국선종을 물들여 온 普照의 頓悟漸修說을 논파하여 宗旨를 바로 세우시니 이는 캄캄한 밤중에 등불을 밝힘과 같았고, 修行衲僧과 宗徒들에게 바른 宗趣를 고취시켜 活鱍鱍한 祖師家風을 회복하신 것이다.
또한 스님께서는 평생 戒律을 엄격히 하셨고, 누구든 佛前에 삼천배를 하지 않으면 話頭를 주지 않고 친견을 허락치 않았으며, 평생 재물을 멀리하셨다. 스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직접 佛供念佛을 해 주지 않았으며, 각자 스스로 參禪精進과 懺悔祈禱를 하고 그 공덕은 남에게 베풀라고 이르셨다. 젊었을 때 십수년간 生食 또는 僻穀으로 지내셨으며, 이후 40여년간 無鹽小食으로 일체 간식하지 않으시고, 廣木 麻布 이외는 입지 않으시고, 거처한 건물에는 단청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출가하여 처음으로 삭발하고, 말년에 20여년을 주석하시던 해인사 堆雪堂에서 1993년 11월 4일 새벽에 臨終偈를 쓰시었다.
生平欺誑男女群하니 彌天罪業過須彌라 活陷阿鼻恨萬端이여 一輪吐紅掛碧山이로다.
잠시 좌정하시다가 시자들에게 참선 잘 하라는 당부를 하고, 앉은 채로 열반에 드시니 世壽는 82세요, 法臘은 58세로 그 모습이 거룩하고 또 거룩하셨다. 7일 葬中에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슬퍼하였고, 그 기간 동안 퇴설당과 백련암 뒷산에 일곱 차례나 放光을 하시니, 그 異蹟에 사부대중은 모두 놀라워하고 감격하였다.
茶毘式에는 30여 만 명이 운집하여 해인사 30리 밖까지 人山人海를 이루니 그 장엄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다비 후 일백 여 과의 舍利를 얻어 七齋 동안 親見法會를 열자 종교를 초월하여 백여만 명의 대중이 모여들어 찬탄하였으니, 이는 불교사에 드문 일이었다. 큰 스님의 무소유와 절약의 정신은 바로 이 시대 부처의 모습이었다. 자기를 바로 보라, 남을 위해 기도하라, 일체 중생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라, 이르시던 그 참되고 소박한 가르침은 오늘도 가야산의 메아리가 되어 영원에서 영원으로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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