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이 참선수행을 강조하는 것을 보자. 깨달음에는 염불도 있고 교학도 있다. 나옹스님이 아미타불을 염불과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은 나와 불러지는 대상이 하나되는 것으로, 무념처라 했으며, 불려지는 주관과 객관을 계속해서 부르면 삼매에 들어감이다.


생각 생각이 염불과 하나가 됨 무념처이고, 거기에서 안이비설신의에서 자색광명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신통이 아니라, 부처님의 색을 자색이라 부름이고, 일념의 상태를 자색이라하는 것이며, 안이비설신의에서 하나가 돼 세상을 본 그것이 중도이다.


그렇기에 염불 봉사 등 여러 가지 불교방법이 있으며, 여기에는 좋고 나쁨이 없이 모든 것이 나하고 하나되는 것이 중요하다. 봉사도 둘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는 것이라서, 하나가 돼 봉사하면 하나가 된 수행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수행이고 불교의 핵심이다. 하나되는 수행을 하면 중도를 체험하는 것으로, 그 중의 하나가 참선이다.


다른 것은 열등하다면 그건 참선우월주의이다. 우월주의로는 제대로 된 참선을 할 수 없다.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 수행 생명이라서, 참선 우월주의는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고, 교만해진다. 곧 참선 우월주의는 참선의 종말이다.


<백일법문>에서 임제스님이 덕산스님은 몽둥이 매질로 깨우침에 이르게 하는 과정, 여기서 황벽스님에게 보내 깨침에 이르게 하고 다시 돌아와 스승 임제스님의 빰을 때리는 가르침 과정이 그런 마음 공부의 일환이다.


성철스님이 ‘내가 남녀를 속여서 지옥에 간다’는 열반송을 남긴 것은 중생에게 이로움이 아니라 독약을 주는 것과 같다는 말을 이해하므로써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된다


선의 핵심은 이것이다. 통상의 ‘화두 들어라’는 말은 저 밑에 있는 것이다.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그대로 발견하는 된다. 성철스님이 그걸 애기한 것이다. 본래 그 자리에서 보면 법문이 쓸데없는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한 것이고 우리는 그걸 열심히 듣고 있다.


여러분이 자신이 위대한 존재인데 그걸 모르고 자기 자신이 못살게 군다. 부처님 같은 분은 악한 사람도 벌을 주지 않고 나무라지 않는다. 그의 본래 모습은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절대 연민한다는 말을 썼지 미워한다는 말은 안했다. 이해가 수행이다.


중도를 이해하면, 남하고 비교를 안하게 되고 지혜가 나오고, 그 일에 대해 의미를 발견한다. 자기의 가치도 알고 자기와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다. 다음 세번째는 자주적인 가치를 갖는 것으로, 수처작주 어디가도 자기가 주인된 주체적인 사람이 된다.


주체의식이 없으면 고통을 받고 집단적으로 사회에서 악영향을 끼친다. 그리스 유권자들이 해달라는 요구를 따라가서 국가부도가 난 경우도 그렇다.


우리나라도 그런 유사성이 있다. 자꾸 복지만 해주다 보면 경제가 그리스 같이 국가부도가 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국가 불행하기 이전에 개개인도 잘못된 것이다. 개인도 주체의식이 있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노력하지 않고 남에게 의지하면 좋은 방법이 아니다.


중도를 이해하면 저절로 그런 삶을 살 수 있다. 중도는 비교하지 않고 가치와 원리를 알면서 주체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일을 못하는 이는 도와야 한다.


먹고 살게끔 도와주는 것은 주체의식을 심어주는 것이고, 주체성 자립심을 갖춘 사람으로 모두 살 수 있도록 정책을 만들어야 하고, 그런 사람을 정치가로 뽑아야 좋은 사회로 가는 것이다. 그만큼 성철스님은 주체의식을 굉장히 강조한다.


성철스님은 문자를 보지 말라는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이는 문자에만 집착해서 공부하지 말고 그 의미를 알고 참선하고 공부하고 경전을 보라는 것이고 염불도 그렇다.


마지막으로 임제스님 덕산스님 황벽스님 간에 깨우침과 가르침의 과정에 얽힌 얘기가 실려있다. 이중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고’ 화두는 나고 향곡스님에게서 받은 화두다.


당시 향곡스님은 강원에서 4교과를 마친 것을 감안해 이 화두를 줬던 것 같다. 강원에서 배운 진리가 한 번에 다 부서지는 화두였다. 믿음만 가면 화두가 공부에서 제일 좋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할 수 있다.


제약이 없는 화두 공부는 좋은 반면, 어려운 점이 의심을 해가는 것이 어려워 의심이 잘 안되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의심도 자신이 불교에 대해 중도의 내용을 정말로 체험하는데 두면 화두가 가장 좋은 방법이다.

참선을 권하고 싶은 이유는 염불과 봉사도 가능하며 경전의 이해를 깊이하는 것 중에서 한 가지 선택한다면 참선을 권한다. 의심만 되면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됨으로 가깝게 가서 체험하고 이뤄지고 오는 것이다. 공부에 대한 믿음이 안가서 않되는 것이지, 믿음만 키워가면 화두 공부가 도움이 크다.


나는 아직도 알음알이로 화두를 보고 있는 한계인지, 한 가지 화두가 해결이 안된 것이 잇다. 내 경우는 화두 공부가 제약없이 마음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화두는 1700개가 있다.


무착스님이 문수보살 친견 얘기를 했을 때 문수보살이 설한 법문이다. “누구나 잠깐 조용히 앉아 있으면/ 항하사 모래알 같이 많은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낫다/ 칠보탑은 필경 부서져 티끌이 돠거니와/ 한 생각 개끗한 마음은 바른 깨달음을 이루느니라.”


대상이 있으면 주관 객관이 벌어지기 시작해, 더 들어가면 주관과 객간이 없는 하나가 되고 이것이 선정이며, 더 들어가면 삼매이다. ‘나’라는 집착이 강할수록 탐진치가 강하다. 탐진치가 없으면 편안해지고 하잘 것 없는 일을 하더라고 자주적인 사람이 된다. 나아가 가정의 화목을 이끌고, 가치있는 일이 된다. 가치 있는 공부 효과는, 효과를 즐김으로 공부가 더 깊이 들어가는 상승작용이다.


<백일법문>에 나온 황벽스님과 임제스님간의 대화 중에 나오는 ‘고안(高安)의 대우스님’은 내가 중국 여행 중 유적지를 발굴해 이제 성지순례 답사코스가 됐다. 당시 황벽스님은 임제스님에게 깨달음의 근기에 맞춰 고안 대우스님을 찾아가라고 말했다.


근기에 맞게 법을 쓰는 것이 전문가가 되는 것이며, 분한 마음이 화두가 되고, 긴 거리를 걸어가며 화두풀이를 해, 깨침 의심의 대상인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됨으로 삼매에 이름이다. 그래서 화두는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는 것이 생명이다.


다음 강의는 <백일법문> 중에 가장 알려주려고 했던 대목으로 51페이지에서 83페이지 읽어보고 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