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을 남기고 떠난 스승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굳게 마음을 먹어도 주변 환경이 도와주지 않거나 자신의 의지가 확고하지 않으면 ‘작심삼일’ 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꾸준하게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신심(信心)이 난다.
서울 구룡사에서 발행하는 사보(寺報) <월간 붓다>가 2013년 2월호로 지령 300호를 맞았다고 한다. 1988년 <구룡사보>를 시작으로 <구룡>을 거쳐 <월간 붓다>로 독자들과 만난 지 벌써 25년이 된 셈이다. <월간 불광> 등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 불교잡지 역사에서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정우 스님에게 <월간 붓다>와 스승 홍법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서울 구룡사를 찾았다. 구룡사는 서울 불광사와 함께 도심포교의 ‘맏형’ 같은 존재다. 비교적 한가한 오후였지만 건물 곳곳에 있는 법당에서 기도하는 불자들이 적지 않았다. 법당에서 참배를 하고 건물 3층 구석에 있는 회주실의 문을 두드렸다.
“너무나 훌륭하신 스님들이 많이 계신데 우리스님 얘기를 먼저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몇 차례 정우 스님을 만난 적이 있었지만 당신의 스승인 홍법 스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차 한 잔을 마시고 스님은 빛바랜 편지 한통을 보여주었다. 길지 않은 내용을 같이 읽었다.

頂宇親展(정우친전)
相別后(상별후) 소식 없어 雲散遠天(운산원천)에 북녘 하늘 바라보며 너 용모를 그립든 차 手書(수서)를 받고 보니 반갑기 그지없다. 그간도 몸 건강히 軍務(군무)에 충실하다 하니 더욱 반갑고나. 이곳은 너희들의 守護(수호)로 山中(산중)이 無故(무고)하니 安心(안심)하라. 그리고 嚴冬雪寒(엄동설한) 매서운 추위도 祖國守護(조국수호)의 任義務(임의무)로 알고 職分(직분)을 다하라.
念念菩提心(염념보리심)하면 處處安樂國(처처안락국)이니 佛子(불자)의 본분을 護持(호지)하여 淸淨(청정)을 汚染(오염)치 말고 榮譽(영예)롭게 歸寺(귀사)를 苦待(고대)한다.
여기는 오랜만에 눈이 내려 月白雪白天地白(월백설백천지백)한대 山深夜深汝思深(산심야심여사심)이라 한결 너 모양이 비치는구나. 말로써 무슨 慰安(위안)이 되겠느냐 이만 줄인다.
1월 18일 弘法(홍법) 合掌(합장)
“1974년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은사스님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무뚝뚝하시지만 상좌를 챙겨주시는 마음이 그대로 녹아 있어요. 편지를 받고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정우 스님은 출가 후 입대해 군승(軍僧) 장교가 아닌 일반 사병으로 복무했다. 그러니 홍법 스님은 여느 아버지와 다르지 않은 마음으로 제자를 챙겼다. 스승의 격려 덕분이었는지 정우 스님은 사병 신분으로 호국황룡사와 호국일월사 등 군 법당을 2곳이나 세우는 원력을 보이기도 했다.
사실 정우 스님이 은사 홍법 스님을 모신 기간은 10여년에 불과하다. 홍법 스님이 49세의 나이로 입적했기 때문이다. 그 10년 동안 행자생활을 하고 강원에 다니고 군 생활을 했으니 실질적으로 가까이에서 모신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수십 년 씩 시봉(侍奉)을 하는 스님들에 비하면 많이 짧은 시간이다. 그렇다면 홍법 스님과 정우스님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짧은 인연, 긴 울림

전북 김제 출신인 정우 스님은 초등학교 때 출가인연이 찾아 왔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김제 망해사로 소풍을 가서 만난 한 스님이 ‘전설처럼 내려오는’ 스님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시골에서 평범하게 자라던 소년에게는 스님들의 이야기가 마냥 신기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스님에게 “저도 스님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가까운 친척 중에 스님이 계셔서 자연스럽게 출가했다. 15살 때였다. 그렇게 정읍 내장사에서 삭발염의하고 승려생활을 시작한 스님은 부안 백룡사, 인천 약사사, 그리고 서울 신대방동 장안사 등에서 정진했다. 그러던 중 장안사에 같이 있던 한 스님이 조계사에서 있는 성안 스님과 신태 스님을 찾아가 보라고 권유했다. 조계사에서 만난 두 스님은 다시 통도사와 홍법 스님을 추천했다. “스님으로서 더 수행정진을 하려면 통도사처럼 큰절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 또 통도사에 가면 홍법 스님이 계시는데 그 스님께 가르침을 받아라.”는 말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스님들은 통도사 강원에서 홍법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었다.   
그렇게 인연이 돼 스님은 통도사로 향했다. 출가한지 3년만의 일이었다. 서울에서 양산 통도사까지 짧지 않은 거리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통도사에 도착해 보니 ‘이곳이 불교고 절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통도사에 계신 어른들이 진짜 스님처럼 보였죠. 제 집에 온 것처럼 너무 편안하고 좋았습니다. 절에 도착하자마자 은사스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저를 추천해 주신 스님의 편지를 전해드렸더니 ‘잘 왔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스님께서는 강원(講院)에서 강사(講師)를 하시고 계셨는데 자상하실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정우 스님은 홍법 스님을 은사로 ‘두 번째 출가’를 했다. 그리고 행자생활을 다시 시작 했다. 절에 있다 와서 인지 생활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강원을 마치고 입대해 군을 제대한 뒤 스님은 홍법 스님을 모시고 태백산 청원사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열반하시기 몇 년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은사스님께서 좀 쉬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태백산에 모시고 갔습니다. 일주일간 제가 공부하고 느꼈던 것들을 많이 여쭈었습니다. 편찮으셨지만 자상하게 답을 주셨고 지금까지도 그때의 문답(問答)이 저에게는 살아가는 공부의 힘이 되고 있습니다. 은사스님께서는 수행자에게 잠과 음식, 의복이 부족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사치를 버려야 하고 잠을 많이 자면 안 되며 음식을 많이 먹어서는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다고 여러 차례 강조하셨습니다. 또 부족한 환경에서 더 공부를 간절하게 할 수 있다고도 가르치셨습니다. 은사스님께서 통도사에 계실 때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절에 불을 지피는 부목 처사님이 스님 방을 따뜻하게 한다고 아궁이에 장작을 조금 많이 넣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스님께서는 온기가 들어올 정도의 양만 남기고 장작을 다시 빼냈습니다. 장작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처사님이 다시 넣고 스님께서는 또 뺐다고 해요. 그 때 스님께서는 ‘방이 너무 따뜻하면 중이 졸기만 한다’고 하셨다고 해요.”

홍법 스님은 前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과 남양주 봉선사 조실 월운 스님과 함께 해인사 강원을 1기로 졸업하고 강사의 길을 걸었다. 당시 불교계에서는 세 스님을 ‘차세대 3대 강사’라고 불렀을 정도로 뛰어난 학인들이었다고 한다. 홍법 스님은 훗날 통도사 강주와 통도사 주지를 역임하기도 했다.
“저에게 수많은 스승님을 친견할 수 있도록 해 주시려고 하셨는지 은사스님께서는 일찍 사바세계를 떠나셨습니다. 어른스님들께 은사스님 법명을 말씀드리면 저를 다시 봐 주셨습니다. 마음을 더 써주신 거죠. 어른스님 모두가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어른스님들께 들은 말씀이긴 한데 현대 한국불교에 세 분의 보살(菩薩)이 계셨다고 합니다. 서울 도선사 청담 스님과 해인사 지월 스님, 그리고 은사이신 홍법 스님을 말합니다. 나중에 은사스님께서 많이 아프셨을 때는 경봉 노스님께서 ‘통도사를 다 팔아서라도 홍법 스님을 살려야 한다’며 많이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정우 스님이 통도사에 갔을 때는 경봉 스님을 비롯한 기라성 같은 선지식들이 영축산에 주석하고 있었다. 홍법 스님이 일찍 입적하면서 할아버지가 손자를 아끼듯 노스님들은 정우 스님에게 각별한 마음을 써 주셨다고 한다.
“그때 산중 어른들은 어린 사미들의 법명을 다 기억해 주셨습니다. 누구 상좌고 법명은 무엇인지 다 알고 계셨어요. 항상 후학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렇게 하지를 못해요. 부끄러운 일이죠. 어른이 될수록 대중들을 살펴야 하는데 저부터 반성하고 있습니다.
극락암에 계시던 경봉 노스님은 찾아뵈면 꼭 사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맛을 물으셨어요. 손자들에게 과자 주시듯 언제나 인자한 모습으로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제가 10대에 견성할 것이라고 마음먹고 인사를 드리면서 당돌하게 ‘저에게 화두 하나 주세요!’ 했더니 노스님께서는 ‘이놈 어디 가려고 망상을 부리노?’ 하시면서 출가자의 근본을 말씀해 주시고는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이것을 평생화두로 참구하고 있습니다.

벽안 노스님은 상당히 꼿꼿한 분이셨습니다. 참 따뜻하게 대해주셨어요. 제가 해보고 싶은 일이 있어 1976년도에 잠시 통도사를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스님께서는 격려 편지를 보내 주셨습니다. ‘정우를 보내고 궁금하던 차 편지를 받아 보고 반겨 하였다. 공부를 위한 것이니 아무쪼록 공부를 착실히 하고 돌아와서 통도를 위하고 또 불교를 위하여 크게 활약하고 훌륭한 승려가 되어라. 우리 불교는 현재 이 사회의 바람을 응수하지 못하고 있다. 젊은 세대는 반성해서 구습을 타파 하여라. 이만 노승 벽안 답’이라고 1976년 10월 12일에 편지를 주셨지요.
월하 노스님은 저에게 아버지 같은 분이셨습니다. 제가 27살 때 은사스님께서 입적하셨습니다. 그때는 정말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손상좌인 저를 늘 따뜻하게 보살펴주셨습니다.
노스님께서는 제가 젊은 시절 머무르고 있던 서울의 작은 절에 두 번이나 다녀가셨습니다. 제가 걱정이 되셨다면서요. 그때가 노스님께서 동국대학교 재단 이사장으로 계실 때입니다. 월하 노스님의 자상함과 자애로움이 저의 젊은 시절을 버틸 수 있게 해준 큰 보살핌이었습니다. 노스님께서는 저를 생명줄처럼 붙들어 주셨습니다.”
은사스님을 대신한 스승님들의 보살핌 때문이었는지 정우 스님은 통도사와 서울 오가며 다양한 포교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시대흐름에 맞는 부응하는 포교 절실
정우 스님이 본격적으로 도심포교에 뛰어 든 것은 1980년대 초였다. 군에서 제대를 하고 통도사와 서울을 오가다 1985년도부터 본격적으로 구룡사를 이끌기 시작했다. 원래 구룡사는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있었다. 그러나 주변에 조계사를 비롯해 칠보사, 선학원 등의 사찰이 있었고, 절 주변이 한옥보전 및 미관 지역으로 지정돼 포교당으로 운영하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어 불가피하게 새로운 지역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정우 스님은 현재의 구룡사 위치로 절을 옮기기로 하고 부지를 구해 천막을 쳤다. 2년간의 천막법당 생활과 다시 2년간의 임시건물 법당 생활을 하면서 1989년도에 지금의 구룡사를 낙성했다.

“그때 처음으로 부처님 금란가사 친견법회를 100일간 진행했습니다. 또 대중들에게 만불전(萬佛殿)을 짓겠다고 말씀드리고 적극적인 동참을 부탁했습니다. 그때 만 명이 넘는 사부대중들이 신심과 원력으로 동참해 줘 2년 만에 만불보전 낙성과 회향이 이뤄졌습니다. 그렇게 구룡사를 낙성하고 다른 포교당도 만들게 됐어요.”
정우 스님이 이렇게 만든 포교당은 국내외에 모두 23곳에 이른다. 포교당을 만들었다가 통도사가 아닌 해당지역 본사에 운영을 맡긴 곳도 있다. 가장 최근에는 필리핀 마닐라에 ‘마닐라 선원’을 개원하기도 했다. 
“제가 포교당을 만든 것은 일도 아닙니다. 통도사 구하 노스님은 일제시대에 이미 도심포교당을 38곳이나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사격(寺格)을 제대로 갖춰서 말입니다. 광덕 스님 역시 불광사를 비롯한 많은 사찰을 만들고 포교활동을 하셨어요. 도심 대중포교는 시대의 목마름입니다. 수년 전부터 신도시가 많이 만들어졌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했을 뿐입니다.”
정우 스님은 구룡사를 비롯한 도심포교당을 모두 조계종에 공찰로 등록했다. 스님은 또 1987년에 극단 ‘신시’(현 신시컴퍼니)를 창단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에 연극 ‘님의 침묵’을 공연했던 적이 있는데, 당시 함께 했던 출연진과 스태프와 마음을 모아 극단을 만들었습니다. 연극도 포교에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극단이 되어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님이 한 박자 빠르게 도심포교에 나서고 극단을 만들고 인터넷 TV, 부다TV(www.buddhatv.com)를 운영하는 것은 “시대의 부름에 함께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월간 붓다>를 만든 것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
“<월간 붓다>는 순수 불교잡지로 만들어 갈 생각입니다. 아마추어적이더라도 아날로그 적이면서 감성적인, 그리고 가슴에 울림을 주는 글들이 실리도록 하고 싶어요. 앞으로 좋은 글들은 인터넷을 통해서도 불자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불교에서 ‘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꼽자면 팔정도의 정견(正見), 간화선에서 간(看), 반야심경에서 관(觀) 등일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자세하게 보면 정견은 인식기관으로, 간은 찾아서, 관은 지혜로 본다는 의미가 있어요. 인식기관으로도 보면서 지혜로도 보는 불교를 이 시대에 구현해야 합니다.”

정우 스님은 1980년대 초반부터 조계종 중앙종무기관에서 일을 했다. 또 중앙종회의원과 통도사 주지를 비롯한 여러 소임을 거치며 다양한 행정경험을 쌓았다. 조계종이 진행하고 있는 ‘자성과 쇄신 결사’에 대한 의견도 궁금해졌다.
“쇄신이라는 것은 자기 근본 도리를 찾는 것입니다. 각자가 도리에 맞게 살면 됩니다. 스님 개인 차원은 물론 종단과 사찰의 근본 도리,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실천해야 합니다. 또 시대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살펴보고 그에 부응하면 됩니다. 우리불교는  사회에 대한 배려와 관심, 친절함으로 국민들에게 ‘어울림’을 좀 더 제공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님은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도 현 조계종의 결사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스님은 스승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홍법문화복지법인’을 만들어 교육사업과 문화사업을 비롯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앞으로도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 달려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할 계획이라고 한다.
출가 50년을 앞두고 있는 정우 스님에게도 30여명에 이르는 상좌와 손상좌가 있다고 한다. 부모가 돼 봐야 부모마음을 안다고 했던가? 마지막 질문을 던지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다음 생에도 인연이 돼 홍법 스님을 만난다면 다시 스승으로 모실 수 있습니까?
“앞서 말씀드렸지만 이번 생에서 은사스님과 저의 인연은 너무 짧았습니다. 그렇지만 은사스님은 늘 저의 가슴 속에 살아계십니다. 어느 회상에서 만나더라도 반드시 인연을 맺을 거라 생각해요. 혹시 제 제자 중에 한사람으로 와서 출가자의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르죠. 하나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은사스님께서 일찍 세상을 떠나시면서 남기고 가신 다른 스님들과의 수많은 인연도 저는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경봉, 벽안, 월하, 석주 노스님을 비롯한 다 말씀드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어른스님들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며 살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