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창제의 숨은 비밀, 불교에 답 있다
등록일 : 2014-10-09 동영상 

우리 역사상 최고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는 ‘한글 창제가 어디서 어떻게 이뤄졌느냐’다. 훈민정음은 1443년(세종 25년) 완성되기 전까지 완전한 비밀 속에 있었다.

이 엄청난 국가 프로젝트는 집현전 학자들도 전혀 몰랐을 정도로 비밀이 유지됐다. 과연 훈민정음은 세종임금 독창으로 이뤄진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의 열쇠는 세종대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던 신미대사(1403~1480)에게 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해 모든 백성이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왕의 곁에 신미대사라는 뛰어난 스님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글은 영원히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태조 이성계에게 무학대사가 있었다면 세종에게는 신미스님이 있었다.

신미대사, 집현전 학사로
범어의 자음과 모음체계 설명
한글창제에 응용할 수 있는
문자 분석 등 지대한 역할 해

신미대사는 세종, 문종, 세조에 이르기까지 3대 왕으로부터 존경을 받은 고승이다. 범어(梵語)와 티베트어로 된 불교경전에 정통했던 대학자였던 스님은 세종의 부름을 받고 집현전 학사로 참여했다. 스님은 충북 영동에 영산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영산김씨 족보에는 ‘집현원학사 득총어세종(集賢院學士 得寵於世宗)’이라는 기록이 있다. 스님이 집현전 학사였으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뜻이다. 당시 스님이 수행정진 했던 복천암의 사적비에도 스님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체계를 설명해주고, 한글 창제에 응용할 수 있는 문자들을 수집ㆍ분석하는 등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의 초석을 다진 스님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복천암에 삼존불을 시주하고, 죽기 전 유언으로 ‘우국이세(祐國利世)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법호를 내렸다. 하지만 유생들의 극렬한 반대로 ‘우국이세(나라를 위하고 세상을 이롭게 했다)’라는 표현은 문종 대에 삭제되고 혜각존자라는 칭호만 후세에 전해지게 됐다.

억불 정책 펼쳤던 조선시대
왕의 배후 적극 참여했다는 사실
대외적으로 알려졌다면
훈민정음 명맥
유지할 수 없었을 것

안타깝게도 실록에는 스님이 집현전에서 일했다는 기록이 없다. 유교를 높이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강력하게 펼쳤던 조선조 초기, 왕의 배후에서 스님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대외적으로 알려졌다면 아마도 한글은 진즉에 없어졌을 것이다. 스님은 한글창제에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모든 공덕을 세종대왕에게 회향하고 다시 절로 돌아갔다.

신미대사를 중심으로 당시 친불교 인사들이 한글창제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한글 완성 이후 유학자들의 행보를 통해서도 읽어낼 수 있다. 한글이 완성되고 이를 본격적으로 공개하자 집현전 실무 담당자인 부제학 최만리를 중심으로 김문, 하위지 등 원로학자들은 집단으로 반발하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최만리는 “굳이 언문을 만들어야 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재상에서 신하들까지 널리 상의한 후 행해야 할 것인데 갑자기 널리 펴려 하시니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다”며 왕의 행동을 비판했다. 상소에서 보듯 최만리는 정음을 가리켜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로 보고 임금이나 세자가 이런 것을 만드는데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못 참아했다.

세종 타계 이후에도
세조가 한글 보급정책 논의 위해
스님 주석처 찾아 법문 들어

이는 불교를 공개적으로 신앙한 친불교적인 세종이 한글을 만들어 불경을 번역해 널리 펴는 일에 유학자들이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다. 표면적인 공격대상은 임금이었지만, 배후에 있는 불교계 인사를 정조준한 것이다. 한글 창제 무렵 간행된 국가적인 번역 사업이 불교경전이라는 점도 이같은 설을 뒷받침 한다.

신미대사와 더불어 한글창제에 기여한 숨은 공로자는 또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수양대군(후에 세조)이다. 수양대군은 왕명으로 부처님의 일대기를 찬술한 불경 언해서인 <석보상절> 등 초기 한글문서를 직접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양대군은 집현전 학자들 가운데 신미대사를 가장 존경했다.

세종 29년 6월5일자 실록 기사에도 ‘김수온의 형이 출가해 스님이 되어 이름을 신미라고 했다. 수양대군 이유와 안평대군 이용이 심히 믿고 좋아해, 신미를 높은 자리에 앉게 하고 무릎 꿇어 절하고 예절을 다하여 공양하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양대군과 신미대사의 인연은 매우 두터웠다. 세조는 한글의 보급정책 등을 논의하기 위해 몇 차례 신미스님을 찾았다.

1464년 세조는 곧바로 온양행궁으로 가지 않고 신미대사가 주지로 있는 복천암을 방문했으며, 스님이 오대산 상원사로 거처를 옮겨 중창불사를 이끌었을 때도 많은 시주를 했다. 세조가 내린 권선문인 ‘상원사중창권선문’에도 절을 고치는데 왕실이 나섰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 학계에서도 훈민정음 창제에 신미스님을 비롯한 불교 인사들이 적극 참여했지만 당시 사회적 반발을 고려, 임금이 스스로 홀로 친히 만들었다는 친제설을 강조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아무튼 임금을 멀리까지 거동하게 할 만큼 신미스님은 중요한 의미를 간직한 인물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