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명예원로의원 미룡당 월탄 대종사 원적
등록일 : 2022-08-04 동영상 

8월4일 오전 10시30분 단양 대흥사서
세납 86·법랍68년…장례절차 논의 중
‘정화 6비구’…불교정화운동의 산증인




1950~60년대 불교정화운동 당시 ‘정화 6비구’ 중 한 명으로 불교정화운동의 산증인이자 조계종 명예원로의원인 미룡당 월탄 대종사가 8월4일 오전 10시30분 주석처인 단양 대흥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납 86세, 법랍 68년.

1937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난 스님은 대학 1학년 때인 1955년 초여름 어느 날, 고시공부를 위해 구례 화엄사를 찾았다가 불연을 맺었다. 화엄사 뒷방을 얻어 공부를 하던 중 당시 지객을 맡고 있던 월국 스님의 위의에 감복해 출가자의 삶을 동경했다.

월국 스님의 도움으로 그해 하안거 해제 법회에 참여해 금오 스님으로부터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산송장이야, 자기를 만드는 게 마음인데 그것을 모르고 이 몸뚱이만 자기라고 알고 살거든. 일체유심조야! 마음이 우주의 섭리를 주재하는 거야”라는 가르침을 듣고 크게 동요해 그길로 출가를 결심했다.

금오 스님과 사제의 연을 맺고 ‘월탄(月誕)’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후 지리산 금정암에서 2년간 은사를 시봉한 뒤 다시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이뭣고’ 화두를 들고 정진을 이어갔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화두를 놓지 않았던 스님은 깊은 삼매에 빠져 시공을 초월하는 경지를 경험하기도 했다. 이후 선교를 겸수했던 선지식들이 그랬듯, 산을 내려와 해인사 강원에서 교학을 탐구했다. ‘초발심자경문’을 시작으로 ‘능엄경’까지 부처님 경전을 배우고 익혔다.

그 무렵 한국불교계는 불교정화운동이 한창이었다. 1950~60년대 수좌 출신의 비구승들은 “‘취처’와 ‘육식’ 등 왜색불교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만이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는 것”이라며 불교정화운동에 매진했다.

그러나 세간법의 잣대는 불교정화운동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법원이 1960년 11월24일 취처승 측에 유리한 판결을 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고조됐다. 그러자 수좌들은 1960년 11월17·19일 서울 조계사에서 승려대회를 열어 불교정화운동의 정당성을 대외에 드러냈다.

해인사에서 상경한 월탄 스님도 조계사 승려대회에 동참해 의지를 불태웠다. 월탄 스님은 한발 더 나아가 1960년 11월24일 성각, 진정, 도명, 도헌, 성우 스님과 더불어 대법원장실을 찾아 “우리는 비구승이다. 어떻게 세상 법으로 부처님 법을 재판할 수 있느냐”며 순교의 각오로 할복(割腹)을 단행했다. 이는 세간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월탄 스님 등 여섯 스님의 ‘할복’ 사건은 불교정화운동의 당위성을 환기시키고, 비구승 중심의 조계종이 출범하는 토대가 됐다. 지금까지 월탄 스님 등 여섯 스님이 ‘정화 6비구’로 회자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불교정화운동이 마무리되자 스님은 다시 출가자 본연의 길로 돌아왔다. 1968년 동국대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1973년 동국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조계사·전등사·법주사 주지 등을 지내며 종무행정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런가 하면 조계종 4대 중앙종회의원을 시작으로 5·6대, 8~10대 중앙종회의원(8대 중앙종회의장)을 역임하며 종단 정치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1990년 제26대 총무원장 선거와 1994년 제28대 총무원장 선거에 출마해 아쉽게 낙선했지만, 탁월한 리더십으로 대중적 관심을 끌기도 했다.

상무주암, 수도암, 무명암, 상원사 등에서 31안거를 성만한 스님은 종단 소임에서 물러난 2013년 단양 미륵대흥사에 은사 금오태전 스님과 사형 성림월산 스님의 이름에서 딴 금성선원(金聖禪院)을 개원하고, 매년 20여명의 수좌들과 정진하며 후학을 제접했다. 2010년 조계종 원로의원에 추대됐으며, 이듬해 해인사에서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다.